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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혁신] 불확실한 EU Green Deal과 CBAM, 한국 철강업의 대응은?

2026.06.30 허재용 조회수 32

규칙이 바뀌고 있다

2026년 1월 1일,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가 전환기간을 마치고 확정기간에 돌입하였다. EU로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 수소를 수출하는 역외 기업들은 이제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 한 탄소 배출량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제출해야 한 다. EU 탄소시장(ETS, Emission Trading Scheme) 연동 가격으로 산정되는 이 인증서는 단순한 보고 의무를 넘어 실질적 무역비 용으로 기업 수익성을 직격한다. 2026년 1분기 CBAM 인증서 가격은 톤당 약 75.36유로로 확정되었으며, EU ETS 가격이 톤 당 90유로 수준일 때 고탄소 강재를 수입하는 EU업체들이 부담 하는 추가 비용은 톤당 약 40~60유로에 달한다.1) 한국 철강업계에 이 충격은 남다르다.

EU 집행위원회 CBAM 전환기간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2023~2025년 신고 물량 기준 으로 철강·쇳물이 CBAM 총 신고 물량의 약 69%를 차지한다. 한국의 경우 CBAM 대상 6개 품목 중 철강이 대EU 수출금액의 89.3%를 차지하며, 연간 약 339만 톤의 철강이 유럽 시장으로 향한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의 철 강 수출은 2025년 약 300억 달러로 전년 대비 9.9% 감소한 데 이어 2026년에도 290억 달러 수준으로 추가 감소가 전망되며, 미국 관세·EU CBAM·중국발 공급과잉이 복합 작용한 결과로 분 석된다.2) 그러나 CBAM은 EU 산업경쟁력이 흔들리면서 제도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EU가 그린딜(Green Deal)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 던 신산업 창출과 기존 산업의 업그레이드는 예상과 달리 심각 한 좌초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CBAM 제도 역시 현실적 결 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EU 집행위원회는 2025년 12월 CBAM 적용 범위를 자동차 부품·가전·건설재 등 철강·알루미늄 집약 하류 제품 180개 범주로 2028년부터 확대하는 법안을 제 안하고 있어, 한국 철강업계는 규제의 파고가 중간재를 넘어 최 종재까지 확산될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본고는 ① 유럽 그린딜 의 균열, ② 한국 철강업이 직면한 세 가지 리스크, ③ 일본 모델 의 벤치마크, ④ 글로벌 생존을 위한 한국형 전략 대안을 차례로 제시한다.3)

기후목표 달성의 불확실성

EU는 2019년 그린딜을 통해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온 실가스 55% 감축(Fit for 55), 2050년 기후중립이라는 법적 구 속력 있는 목표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 경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KEEI)의 2025년 7월 분석에 따 르면, 글로벌 무역 갈등, 공공부채에 따른 청정에너지 투자 여력 축소, 기술 불확실성이 2040년 기후목표 달성 가능성을 위협 하는 핵심 변수로 지목되었다. 실제로 유럽의회는 2025년 7월, 2040년 기후목표를 90% 감축으로 상향하는 기후법 개정안의 긴급처리를 부결하였으며, 이로 인해 목표치 조정이 불가피해 졌다. EU가 그린딜의 '규제 과잉'을 스스로 인정하고 규제 간소 화 패키지를 추진하는 흐름은, 야심찬 기후 어젠다와 산업 경쟁 력 사이의 긴장이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4)

그린딜 신산업 창출 구상의 어그러짐과 중국의 공세

그린딜의 핵심 구상은 탈탄소화를 통한 유럽 주도 클린테크 산업 창출이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2022년 미국 인플레이션감 축법(IRA) 시행 이후 유럽 친환경 기업들이 보조금을 찾아 대서 양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러-우 전쟁으로 촉 발된 에너지 가격 급등은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을 추가로 잠식 하였다. 여기에 미국의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로 배제된 아 시아산 저가 제품이 유럽으로 전환 유입되는 '무역 전용(trade diversion)' 위험이 긴박한 과제로 명시되었다.5) 2024년 9월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가 발표한 「EU 경쟁 력의 미래」 보고서는 유럽의 글로벌 경쟁력이 '실존적 위험'에 직 면했다고 경고하며, 연간 7,500억~8,000억 유로 규모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하였다. 드라기는 CBAM에 대해서도 역 외 기업들이 이를 '우회'할 가능성을 지적하며 제도 보완 필요성 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그린딜이 의도했던 '친환경 산업 리더십' 은 아직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규제 비용만 증가하 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6) 유럽 산업이 내부 규제 과부하로 약화되는 틈을 중국이 파고 들고 있다. 알루미늄 스크랩 시장이 가장 선명한 사례다. CBAM 은 스크랩을 재용해한 알루미늄 제품에 탄소 배출량을 0으로 산정하는 방법론적 허점을 안고 있다. EU는 알루미늄을 국가 전 략 소재산업으로 위치 짓고 보조금을 지급하며 저탄소 전기로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해왔으나, 중국은 바로 이 허점을 정확하 게 파고들었다. 자국에서 생산된 스크랩을 재용해해 알루미늄 제품으로 만든 뒤 '0 배출' 제품으로 EU에 수출하면 CBAM 비용 을 전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동시에 중국·인도 바이 어들은 더 높은 구매가격을 앞세워 유럽산 알루미늄 스크랩 자 체도 대거 매집하고 있어, 유럽 알루미늄 제조업체들의 원료 공 급 고갈과 원가 부담이 동시에 가중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 가 2025년 3월 발표한 「유럽 철강·금속 액션플랜(COM(2025) 여전히 가동 중단 상태임을 명시하였다. 유럽철강협회(Eurofer) 와 유럽알루미늄협회는 이미 스크랩 수출 제한을 EU 집행위에 공식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한 바 있다.5) 그러나 EU는 그린딜을 근본적으로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 다. CBAM은 EU ETS와 Fit for 55 패키지의 법적 핵심 축으로 통 합되어 있어, EU가 한 번 후퇴하게 되면 그 동안 어렵게 쌓아올 린 기후변화 관련 주도권이 붕괴할 수 있다. 이에 집행위원회는 2025년 12월 CBAM 적용 대상을 세탁기·자동차 부품·농기계 등 180개 하류 제품군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제안하며 오히려 규제의 망을 넓히고 있다. CBAM은 이미 경로 의존적 규범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재무 리스크: 막대한 비용 증가의 현실

CBAM 도입은 철강 수출 수익성을 구조적으로 훼손할 잠재 력을 지닌다. Fastmarkets의 분석에 따르면, 2026년 기준 EUA 가격이 톤당 90유로 수준일 때 고탄소 강재 수입업체들은 톤 당 40~60유로의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이 부담은 2034 년 무상할당 완전 폐지 시점까지 EUA 가격 상승과 함께 지속 증 가한다. 철강 슬래브 등 반제품은 수입원가의 20% 이상이 탄소 비용에 해당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본값(default value) 리스크다. EU의 새 시행규정은 실측 데이터를 제출하지 못하는 수입업자에게 국가별·품목별 보수적 기본값을 적용하되, 2026 년에는 10%, 2027년에는 20%, 2028년 이후에는 30%의 할 증을 추가 부과한다. 중국산 철강 슬래브의 경우 기본값 기준 CBAM 비용이 톤당 약 144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7)

기술·경제적 리스크: 전환 경로의 험난함

저탄소 철강 생산을 위한 기술 전환 자체가 막대한 비용과 불 확실성을 수반한다. 블룸버그(BNEF)의 2025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스크랩-전기로(EAF) 방식의 철강 생산원가는 톤당 약 639달러로 기존 고로-전로(BF-BOF)의 운영비 606달러 대비 약 5% 높다. 수소환원제철은 현재 기준 톤당 1,000달러 이상으 로 BF-BOF 대비 60% 이상 높아 상업적 경쟁력을 확보하기까 지 장기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전환 투자가 CBAM 비용 증가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다. S&P 글로벌은 '2026년은 수십 년 만에 가장 자본 집약적인 설비 교체와 CBAM 비용 증가가 동 시에 닥치는 해'라고 진단하였다.8)

시장점유율 리스크: EU를 넘어 글로벌 생존의 문제

Global Efficiency Intelligence에 따르면, 중간 탄소 가격 시나리 오에서 CBAM 도입으로 한국의 대EU 철강 수출은 2034년까지 누적 약 24% 감소할 전망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위협은 중 국이다. 중국의 2025년 철강 수출은 1억 1,700만 톤으로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였으며, 중국 철강사들은 내수 둔화 속에 서도 저가 수출을 지속하며 글로벌 시장 가격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철강 시장은 가격 하방 압력에 노출되었 고, 열연·후판 등 범용 제품 경쟁력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CBAM 대응을 위해 국내 탄소비용을 급속히 상승시킬 경우, 중국산 저 가 철강이 국내 시장을 잠식할 위험도 현실화된다.

페로타임즈 의 2026년 전망 분석은 '탄소비용 현실화’ 오히려 중국의 국내 시장 침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드는 역설을 경고한 바 있다.9) 이 세 가지 리스크가 동시에 현실화될 경우, 한국 철강업계는 '비용 증가 → 수익성 악화 → 전환 투자 여력 감소 → 탄소 경쟁 력 개선 지연 → 시장점유율 추가 잠식'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위 험이 있다. EU 시장은 중요하지만, 한국 철강사에게 EU는 전체 수출의 일부일 뿐이다. 중국·일본과의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 는 동시에 EU 시장 접근성을 유지하는 복합 전략이 필요한 이 유다.

GX 전략: 국가가 전환 리스크를 분담하는 모델

일본 정부는 철강 탈탄소화를 기업 단독의 과제가 아닌 국가 전략 산업 전환 프로젝트로 정의하였다. 2025년 2월 내각은 향 후 10년간 150조 엔의 공공·민간 투자를 동원하는 「GX 2040 비전」을 채택하고, 철강 등 전환 난이도가 높은 업종(hard-to- abate sector)에 2조 8,000억 엔을 배분하였다. 정부는 「에너지· 공정 전환 지원사업」 아래 닛폰 스틸에 약 2,515억 엔, JFE 스 틸에 약 1,045억 엔의 보조금을 결정하였으며, 이는 전기로 신 설 투자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직접 분담하는 구조다. 동시에 2025년 1월 개정된 「녹색조달법」은 저탄소 강재를 우선 조달 품목으로 지정하고, 혁신 전기로 강재 활용 차량에 보조금을 최 대 5만 엔 추가 지원하여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조율하였다.10)

GX-ETS: 탄소가격 내재화와 산업경쟁력 균형의 해법

CBAM이 단순한 탄소 관세가 아닌 이유는, EU가 이미 자국 탄소 가격을 지불한 수출국에는 그 비용만큼 CBAM 인증서 구 매 의무를 깎아주는 공제 메커니즘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 근 거가 CBAM 규정(Regulation (EU) 2023/956) 제9조(Article 9) 다. 제9조는 수입업자가 수출국의 생산 공정에서 이미 지불된 탄소 가격에 해당하는 만큼 CBAM 인증서 제출 의무량을 감축 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단, 무상으로 할당받은 배출권 범위 내 배출에는 공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0원 지불 = 0원 공제'라는 원칙이다.11) 이 원칙 앞에서 한국과 일본의 처지는 표면상 유사해 보이지 만 제도 설계의 핵심에서 차이가 있다. 일본은 2026년 회계연 도부터 GX-ETS를 강제 이행 체제로 전환하여, 철강업종에 벤치 마크 기반 무상할당을 적용하되 벤치마크를 초과하는 배출량 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배출권을 유상 구매해야 한다.

한국도 K-ETS 4기(2026~2030)에서 철강업종의 100% 무상할당 원 칙은 유지되나, 배출허용총량이 3기 대비 약 22% 축소되면서 무상할당 절대량이 줄어들어 철강사들은 부족분을 시장에서 구 매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CBAM 제9조 공제 적용 측면에서 는 차이가 있다. 일본의 초과분 유상구매는 법적 구속력 있는 탄소가격 납부로서 공제 근거가 명확한 반면, 한국의 시장 내 배출권 거래가 제9조 공제 대상으로 EU에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현재 기술협의 중인 미해결 쟁점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일본 GX- ETS의 벤치마크 자체도 EU ETS 상위 10% 기준보다 덜 엄격하 게 설정되어 있어 CBAM 납부액을 완전히 상쇄하지는 못한다. 일본은 2023년 EU 집행위원회 고위급의 방일(訪日) 대화를 계 기로 GX-ETS의 제9조 공제 인정 여부를 공식 의제로 다루었으 며, 한국도 전담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K-ETS 탄소 가격의 EU 공 제 인정을 위한 기술 협의를 진행 중이다.

다만 양국 모두 협의 가 아직 구체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철강업종 무상 할당 구조를 유지하는 한 제9조 공제의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 일 수밖에 없다.12) 13) 14)

공동 기술 개발: 경쟁사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

일본 철강업계의 또 다른 차별점은 경쟁사 간 공동 기술 개 발 체계다. 2022년 닛폰 스틸·JFE 스틸·고베 스틸은 「수소제 철 컨소시엄」을 결성하고, NEDO 그린 이노베이션 펀드 지원 하에 SuperCOURSE50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JFE 스틸 지 바 공장 파일럿 고로에서 이미 33% 배출 감축을 실현하였다. Renewable Energy Institute는 '한국은 기술 개발에서 각자도생 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경쟁사들이 함께 기술적 해 법을 개발한다'고 평가하였다. 물론 한국 철강사 간의 첨예한 이 해관계와 시장점유율 경쟁을 감안할 때, 일본식 자발적 컨소시 엄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공통 과 제'와 '경쟁 과제'를 분리하는 설계라면 가능성이 있다.15)

대안 1. 탄소비용 내재화의 딜레마를 풀어낼 '국가 조율형 점진적 전환 패키지'

K-ETS 유상할당 비율 0%가 CBAM 비용을 EU에 전액 '헌납' 하는 구조를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급격한 유상할당 상향은 정 반대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탄소비용이 급격히 내재화되면 국내 철강 생산비가 상승하고, 중국산 저가 철강이 국내 시장을 파고드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환경정책 문제가 아니 라 냉혹한 국제 통상 시장에서 산업 경쟁력이 교차하는 복합 방 정식이다. 일본 GX-ETS가 제시한 답은 '속도의 조율'이다. 즉, 탄소가격 의 내재화 속도를 업종별 전환 역량에 맞게 정교하게 설계하되, 탄소비용 부과로 발생하는 수익은 전액 해당 산업의 탈탄소 전 환 기술에 환류하는 구조다. 한국 정부는 이 모델을 참고하여 ① K-ETS 유상할당 비율을 철강 업종에 한해 단계적(3~5년 주기) 으로 상향하되, ② 이에 연동하여 중국산 수입 모니터링 강화·세 이프가드 제도를 동시에 정비하고, ③ 상향으로 발생한 수익을 ' 철강 전환기술 공공투자 기금'으로 직결하는 3단계 패키지를 설 계해야 한다.

포스코경영연구원이 지적한 바와 같이, 수입모니 터링제도 신설과 원산지규정 강화는 탄소비용 상승에 따른 국 내 시장 잠식을 방어하는 필수 전제 조건이다.16)

한-EU 탄소 상호인정협정(MRA)이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현재 K-ETS에서 지불된 탄소비용을 CBAM 제9조 공제로 활 용하려면, EU 집행위원회가 그 금액을 '동등한 탄소 가격'으로 공식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한 법적 통로가 CBAM 규정 제18 조(Article 18)다. 제18조는 'EU는 제3국과의 협정을 통해, 해당 국의 탄소 가격 제도를 CBAM과 연계하거나 동등한 것으로 인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며, 이 경우 해당국에서 지불된 탄소비용 은 CBAM 인증서 납부 의무에서 전액 공제된다. 즉 K-ETS 유상 할당을 통해 실제로 납부한 탄소비용이 EU로부터 '동등'으로 인 정받게 되면, 그 금액만큼 CBAM 인증서 구매 의무가 줄어드는 구조다. 아울러 이 협정이 체결되면 철강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 검증 자료를 양국이 상호 인정함으로써 기업의 생산전략 관련 기밀을 보호하고, 중복 검증 부담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제18조는 '가능성'의 근거를 열어두었을 뿐, 자동으로 공 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EU가 제18조를 근거로 협정을 체결한 국가들은 EEA(유럽경제지역), 스위스 등 EU ETS 와 완전히 연계된 국가들에 한정된다. 한국은 아직 이 범주에 포 함되지 않는다.17) 따라서 산업통상자원부는 EU와의 양자 협력을 통해 K-ETS 를 EU가 인정하는 '동등 탄소 가격 체계'로 격상시키는 「한-EU 탄소 상호인정협정(MRA)」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 EU 집행위원 회는 2025년 8월 '제3국 탄소가격 공제 방법론'에 대한 이해관 계자 의견 수렴을 개시하였는데, 이는 제18조 협정 체결을 위한 세부 기준 마련 과정이다. 한국이 이 논의에 선제적으로 참여하 고, 협상 개시를 요청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18)

대안 2. 산업계 공통 과제에 집중하는 ‘정부 주도형 선별적 협력 플랫폼’

한국 철강업계의 현실에서 일본식 자발적 기술 컨소시엄을 그대로 구현하기는 어렵다. 포스코·현대제철·동국제강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동업자이며, 특정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과 정에서 지적재산권과 경쟁 우위를 둘러싼 이해 충돌이 불가피 하다. 그러나 분리 가능한 공통 과제가 있다. ‘탄소 데이터 측정· 보고·검증(MRV) 표준화’와 ‘중소 협력사 탄소 데이터 역량 지원’ 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철강협회가 주도하고, POSRI·한국생산기술연구원·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이 참여하 는 ‘국가 탄소데이터 공공 플랫폼’을 구축하되, 여기서 생성되는 공통 MRV 데이터와 배출계수는 모든 철강사가 활용할 수 있도 록 개방하는 방식이다. 철강 관련 CBAM 대상 중소 협력사는 약 2,500개에 달하지만 이들의 탄소 데이터 산정 역량은 여전히 취약하며, EU 기본값 적용 시 10~30%의 할증 페널티를 고스란 히 부담해야 한다.

이 플랫폼을 통해 협력사들의 공급망 탄소 데 이터를 체계화함으로써, 대기업과 협력사가 동반 혜택을 누리 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기술 경쟁이 예민한 수소환원제철·전기 로 전환 기술은 개별 기업이 자체적으로 추진하되, 국가 R&D 예 산을 통해 각 사의 독자 실증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형식을 취하 는 것이 현실적이다. 산업부의 2026년 업무계획이 ‘첨단제조 AI 대전환’과 ‘AI 팩토리 500곳 확대’를 전략 축으로 설정한 것처럼, 철강 공정의 AI 기반 탄소배출 최적화와 에너지 효율화 기술은 정부 R&D 지원이 적합한 공통 과제다.19)

대안 3. 신전략산업과의 연계를 통한 ‘저탄소 수요 시장의 선제 창출’

저탄소 철강 전환의 가장 큰 난제는 ‘기술이 준비되기 전에 시 장이 먼저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조기에 전환 투자를 단행 하면 비용은 올라가지만 수요는 아직 불확실하다. 이 간극을 메 우는 것이 바로 국내 전략산업과의 연계다. 일본 정부가 녹색조 달법으로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조율했듯이, 한국 정부도 국내 미래산업의 철강 수요를 저탄소 철강 수요로 전환하는 정책 설 계가 필요하다. 첫 번째 연계 축은 AI·데이터센터 인프라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상업용 건물보다 철강 투입량이 많으며, 에너지저장장치 (ESS)·전력 설비·차폐 구조물에는 고강도·고내열 강재가 요구된 다. 현대제철은 이미 탄소 배출량을 기존 대비 20% 절감한 저 탄소 강판의 양산 체제를 갖추고,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협약 을 맺어 아시아·태평양 지역 데이터센터에 탄소 저감 철강재를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AI 데이터센터의 저탄소 강재 우 선 조달'을 정부 가이드라인으로 명문화하면, 국내 수요가 저탄소 전환 투자의 초기 수익 기반을 마련해 주는 선순환이 가능하 다. 한국이 추진 중인 AI·피지컬AI의 제조업 융합, 즉 AI 기반 스 마트 팩토리 설비에 사용되는 구조재·정밀 강재의 국산 저탄소 철강 활용도 이 범주에 해당한다.20) 두 번째 연계 축은 방산·조선이다. 방산 소재는 성능과 안보라 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국산으로 대체가 불가하며, 가격보다 품 질·규격·공급 안정성이 우선되는 시장이다. 포스코가 개발한 함 정용 고연성강과 방탄강은 이미 이 시장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기존 후판 대비 연신율을 35% 이상 끌어올리고 충격 흡수 성능 을 약 58% 개선한 고연성강, 두께를 약 30% 줄이면서도 방호 성능을 유지한 방탄강은 함정 생존성과 직결되는 전략 소재다.

러-우 전쟁 이후 글로벌 방산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한국 방산 수출의 기반 소재를 저탄소 특수강으로 연결하는 'K-방산 저탄소 강재 패키지'는 EU CBAM 대응 수요와 방산 수요를 동시 에 잡는 이중 전략이 된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이 분석한 바와 같이, 방산·조선은 국가 전략 자산으로서 정부 육성정책과 맞물 려 수요가 구조적으로 증가하는 산업이다.21) 세 번째 연계 축은 글로벌 시장 전략의 재구성이다. EU는 중 요한 시장이지만 한국 철강의 유일한 전선이 아니다. 페로타임 즈의 2026년 분석이 지적한 대로, 글로벌 철강 경기에서 '어떤 제품·어떤 시장에서 얼마나 판매하는가'가 실적을 가르는 해가 되었다. 중동·동남아·인도 등 非CBAM 지역에서는 CBAM 규제 없이 한국산 고품질 강재의 가격 경쟁력이 유지된다. 이 지역의 인프라·에너지·제조업 투자 확대와 K-방산·K-조선 수출을 연계 한 철강 수출 전략은 EU 시장 의존도를 분산하면서 글로벌 점유 율을 확대하는 현실적 경로다.

EU CBAM 대응을 위한 저탄소 제 품 전환은 EU 시장 접근성을 지키는 동시에, 미국·일본·유럽 완 성차 업체의 공급망 탈탄소화 압력에도 대응하는 공통 역량이 된다는 점에서 중장기 경쟁력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22)

국가와 산업이 함께 만들어야 할 수요

유럽 그린딜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EU는 CBAM의 망을 좁 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히고 있으며, 한국 철강업계가 직면 할 규제 파고는 더 높아지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중국발 공급 과잉과 미국의 관세 압박이 맞물리며, 한국 철강업계는 EU 시장 에서의 탄소 규제 대응과 글로벌 저가 경쟁이라는 두 개의 전선 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국면에서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일 본이 GX 전략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국가가 탄소비용 내재화의 속도를 조율하고, 수입 시장 보호 장치와 전환 기술 투자를 패키 지로 설계하며, 전략산업의 수요를 저탄소 철강 수요로 전환하 는 정책 일관성이 필수적이다. 기업들도 첨예한 경쟁 관계를 유 지하면서도 공통 과제인 탄소 데이터 플랫폼과 공급망 역량 강 화에는 협력하는 실용적 자세가 요구된다.

한국 철강업계의 생존과 도약은 EU 규제에 대한 수동적 대응 이 아니라, AI·방산·데이터센터라는 국내 미래산업과의 적극적 연계를 통해 저탄소 강재의 새로운 수요 시장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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